에드바르 뭉크, 그는 왜 내면 세계를 탐구한 화가가 됐나(인생 풀스토리)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년, 노르웨이)는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겸 판화 작가다. 단순하며, 강렬한 색채를 통해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드바르 뭉크는 노르웨이에서 '국민 화가'로 불리며 위인 대접을 받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그의 초상이 1,000 노르웨이 크로네 지폐에 들어가 있다. 뒷면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태양'이 도식화되어 담겨 있다.
뭉크는 군의관 아버지와 예술적 소양을 갖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삶에는 어린 아이가 겪지 않았다면 좋았을 불운이 연거푸 찾아왔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몇 년 후에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큰 누이마저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시기에 어린 여동생은 정신병 진단을 받았고, 점점 종교에 집착하게 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며 광신도처럼 변해갔다. 게다가 뭉크는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해 잔병치레가 잦아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그가 찾은 유일한 탈출구가 그림이었다.
뭉크는 자신의 감정을 캔버스에 담아내며 어두운 현실을 잊고 견뎌냈다.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가정사뿐 아니라 연애사도 순탄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여자와의 관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뭉크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밀로 탈로, 다그니 유엘(Dagny Juel), 툴라 라르센이라는 세 여자와 나름 각별한 인연이었다고 알려졌지만 어느 누구하고도 제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뭉크는 1885년 22세의 나이에 프리츠 탈로라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첫 파리 여행을 떠나게 되고, 거기에서 프리츠 탈로의 형수인 밀리 탈로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상대가 유부녀였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불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뭉크와 밀리 탈로의 밀애를 보여주는 작품이 '키스'다. 은밀한 방에 숨어 키스를 하는 젊은 남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자신과 연인의 관계를 담아낸 듯하다.
뭉크는 밀리 탈로에게 순정적인 사랑을 내보이지만, 그녀는 자유분방한 여자였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화류계에서 팜므파탈로 이름을 날렸다는 설도 있어, 이 연애를 통해 뭉크가 끊임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두 번째 사랑은 어릴 적 친구인 다그니 유엘이다. 하지만 다그니 유엘을 두고 여러 사람과 사랑의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다그니 유엘이 뭉크의 친구와 결혼하면서 두 번째 사랑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뭉크는 이 사건으로 자신이 받은 내적 고통을 '마돈나'라는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여성미로 남성을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팜므파탈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작품 '마돈나'는 1893년부터 1894년에 걸쳐 유채화로 완성되었고, 다시 1895년부터 1902년에 걸쳐 석판화로 변주되었다. 유채화에는 화면 테두리가 없고, 석판화에는 테두리가 있다는 차이가 있다.
두 번의 실연을 딛고 마지막으로 툴라 라르센이라는 여성과 교제를 하게 됐다. 툴라 라르센은 초반만 해도 두 번의 큰 아픔을 겪은 에드바르 뭉크의 마음을 잘 치유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집착에 가깝게 변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툴라 라르센은 뭉크를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고, 이에 뭉크가 거리를 두자 그녀는 자살협박을 하고 만다.
그리고 자살협박에 이어 자살시도를 하던 툴라 라르센을 말리던 도중 에드바르 뭉크는 툴라에 의해 잘못 발사된 권총에 의해 왼쪽 중지가 잘리는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후 그린 그림이 '마라의 죽음'이다.
'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 당시 한 여성에게 살해당한 혁명가 마라에 빗대어 자신의 사연을 담아낸 작품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작품에 구현해내는 뭉크의 성향을 잘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그리고 연속된 사랑의 실패를 겪은 뭉크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인물화로 표현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 또 본인의 몸이 태어날 때부터 약해서 이런 방면으로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우울하거나 신경증적인, 불안의 느낌이 나는 우중충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대 유행하던 풍경화를 위시한 자연주의의 경향에서 벗어나 이후 융성하게 되는 표현주의 양식을 주로 채택했다. 다만 평생 우중충한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다. 화폐에 담기기도 한 '태양'이라는 작품처럼 밝고 화사한 작품도 그렸다.
현재도 무척 유명한 화가이지만 생전에도 돈을 잘 벌었다고 한다. 많은 화가들이 사후 유명해지는 것을 감안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을까. 에드바르 뭉크는 생전, 두 지역의 넓은 땅을 구매해 거기에 살며 그림을 그렸다. 또 대량의 판화 작품도 제작했으며, 한 작품을 팔고 나면 같은 소재로 작품을 또 그리는 일을 반복해 작품의 숫자가 많아졌다. 현재 뭉크미술관이 그의 전 작품을 소장하게 될 수 있는 이유다.
에드바르 뭉크는 1944년 1월 23일 사망, 유언을 통해 자신의 전 작품을 시에 기증했다. 잔병치레도 많고 약하게 태어났다는 세간의 이야기를 감안하면 향년 80세, 그 시대 꽤나 장수한 편에 속하지 않나 싶다.
사실 이처럼 에드바르 뭉크를 찾아보게 된 이유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한 번쯤 봤을 작품 '절규(The Scream)' 때문이다. 배경의 풍경은 노르웨이 오슬로의 이케베르크 언덕에서 보이는 오슬로피오르이다.
'절규'는 작품 속 주인공이 절규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 작품이 말하는 절규란 해 질 무렵 뭉크가 겪은 자연이 만들어 낸 핏빛 노을의 환영이다. 작품 속 주인공이 귀를 막고 있는 이유 역시 자연의 절규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다.
이 같은 행동을 한 이유는 해 질 무렵, 즉 해가 넘어갈 이 시각이 사후 세계와 이어진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귀신과 마주할 것 같은 시간대인 것이다.
뭉크가 처음 이 작품과 함께 공개한 메모에는 '자연의 절규'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사람의 절규가 아닌 자연 전체를 아우르는 절규를 담아낸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뭉크의 친구이자 스웨덴의 유명한 염세주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는 1896년 '절규'에 대해 "분노로 붉어진 자연. 신과 같아질 수 없으면서도 신이 되고자 망상하는 어리석은 미물들에게 뇌우와 천둥으로 말하기 시작한 자연 옆에서의 경악의 비명"이라고 썼다.(Arnold 1986)
뭉크의 '절규'는 최초의 유화 버전을 비롯해 총 4점의 연작이 존재한다고 하니 다음에는 이 작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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